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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여이연/서평

채윤정 <다양성을 유지하는 신성한 방식> 갑작스러운 남자의 부고. 그리고 여자에게 위임장이 날아든다. 여자를 유산관리인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위임장이다. 중산층 주부였던 에디파는 한때 애인이었던 남자의 유서에 따라 일상을 내팽개치고 유산 관리를 위해 무작정 길을 떠난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와 맞닥뜨린다. 일종의 수사관이 되어 그 문제를 풀어나간다. 1960년대 출간돼 포스트모던 문학의 신화가 된, 놀랍게 잘 쓴 이 미국 소설은 흥미를 유발하는 추리 형식을 차용한다. 주인공 에디파가 남자의 재산이 전시돼 있는 샌나르시소라는 거대 자본주의적 공간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은 세계의 감춰진 진실이며, 그것을 풀 열쇠인 낯선 단어 ‘트리스테로’이다. 트리스테로는 비주류 우편 시스템을 나타내는 암호이다. 남자가 남긴 유산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내기.. 더보기
임옥희 <우리는 얼마나 휘황한 언어에 중독되어 있는가> 한밤중 도심의 상가. 손에 휴지통을 든 소녀가 서 있다. 나이에 맞는 인형이 아니라 휴지통을 들고 서 있는 소녀라니. 뜬금없고 기괴하다. 소녀는 부모가 누군지, 집이 어딘지,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소녀는 직무상 이것저것 물어보는 경찰에게 자기 나이가 열네 살이라고 답한다. 경찰은 소녀를 정신지체로 여겨 아동복지원에 넘긴다. 아동복지원에서 흔히 일어날 법한 가혹한 행위나 비참한 사건은 없다. 소녀는 복지원에서도 잉여인간이다. 교육을 받지만 낙제해 같은 학급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소녀에게는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심하게 앓아서 병원으로 이송되고 갑자기 늙어버린다. 의사가 데려온 늙은 부인이 울면서 자기가 소녀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죽어가던 늙은 아이는 천천히 눈을 뜨고서 “당신을.. 더보기
배수아 작가 <제국의 도시는 거기 있는가> 나는 어느 날 시인지 산문인지, 산문인지 소설인지, 단편인지 장편인지, 그리고 그 안에 묘사된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그림자인지 실체인지 알 수 없는 책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이탈로 칼비노의 (민음사 펴냄)이다. 그리고 그 책을 다 읽은 다음, 이것은 인간의 여행과 몰락에 관한, 더없이 아름답고 독창적인 글이라고 받아들였다. 13세기 베네치아 출신의 동방여행자 마르코 폴로는 어느 고요하고 한가로운 저녁, 베이징 궁정의 뜰에서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 칸에게 그동안 자신이 칸의 명령으로 돌아보고 왔던, 그러나 칸 자신은 결코 보지도 알지도 못하며 앞으로도 가보지 못할 광대한 제국의 머나먼 도시들을 하나하나 묘사해준다. 55개에 이르는 각 도시의 스케치는 짧으면 겨우 반 페이지, 길어야 서너 페이지에 불과.. 더보기
임옥희 한겨레 21 서평 요즘 영미권에서 널리 읽히고 있는 작가군 중에는 비서구 ‘3세계’ 출신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들의 소설은 작품성뿐만 아니라 상업성까지 두루 인정받고 있다. 제이디 스미스(·자메이카), 주노 디아스(·도미니카공화국), 키란 데사이(·인도), 할레드 호세이니(·아프가니스탄), 하니프 쿠레이시(·파키스탄), 부치 에메체타(·나이지리아), 수전 최(·한국), 수키 김(·한국), 줌파 라히리(·인도)…. 일일이 열거할 공간이 부족할 정도다. 서구에서는 이런 일군의 소설들을 편의상 ‘포스트식민소설’로 분류한다. » 영미권 이주 2세대는 부모 세대가 가져온 조국의 기억과 민족의 전통을 물려받으면서도 그로부터 거리를 유지한다. 왼쪽부터 제이디 스미스, 주노 디아스, 줌파 라히리, 할레드 호세이니(사진 REUTE.. 더보기
문영희샘, <<분노>> 서평입니다. 살만 루슈디의 (문학동네 펴냄·2007)는 ‘분노를 장착한 어른 아이, 가출했다 돌아오다’로 요약된다. 소설 서두에서 주인공 솔랑카는 ‘학자, 인형 제작자, 독신자, 은둔자’로 소개된다. 이는 소설적 트릭일 뿐, 읽다 보면 진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주인공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학자도 독신자도 은둔자도 아니다. 조신한 아내와 딸 같은 젊은 피,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고 싶은 올드보이다. 1980년대, 영국 대학의 폐쇄성과 치열한 내부 경쟁에 염증 난 그는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인형 제작자로 전신한다. 텔레비전의 세계에 뛰어들었지만 오래지 않아 인형들이 자신을 배신하는 상황에 마주친다. 자신의 창조물이 대중적으로 재탄생돼 인기를 독차지하는 상황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 더보기
최인자샘의 <<부서진 사월>> 서평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이 절대적 계명이 인간의 살인 행위를 막을 수 없음은 이미 입증된 지 오래다. 웬만한 살인은 이야깃거리도 안 되는 세상에서, 이 계명은 그저 ‘분명 살인은 일어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인하지 않는다’는 분열증적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지켜지지는 않지만) 있다는 이유로, 우리는 ‘살인’이라는 빈번한 행위를 낯설고 예외적인 사건으로 간주하고 죽음과 삶을 깔끔히 분리하듯이 살인자와 나를 구별하며 평온한 일상을 영위한다. 그런 점에서 은 복잡한 소설적 장치나 화려한 수사도 없이 우리의 마비된 의식을 내려찍는 육중한 도끼 같은 작품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대신 ‘반드시 살인하라’는 계명이 지배하는 세계, ‘오직 사람을 죽인 연후에야, 그리하여 .. 더보기
한겨레21 월요 독서클럽 <어느 섬의 가능성> 늙지 않는 세상에서의 성적 판타지 [2009.01.30 제745호] [월요일 독서클럽] 죽거나 사랑하거나, 노회한 냉소주의자 미셸 우엘벡의 교묘한 전략 “삶은 오십부터 시작이다. 그건 맞다. 삶이 마흔에 끝난다는 것만 빼놓고.” 늙어서 죽는다는 것.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늙는다는 사실이 분해서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린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셸 우엘벡의 (열린책들 펴냄)은 늙어가는 남자들이 경험하는 분노와 치욕을 사랑의 유토피아로 포장한 소설이다. 남자들이 느끼는 ‘근원적인’ 공포를 견딜 수 없어 우엘벡은 젊음·아름다움·새로움만을 숭배하는 성적 파시즘의 세계로 끊임없이 도피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성적) 결핍과 불만족이 그에게는 소설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의 원천이 된다. .. 더보기
한겨레21 월요 독서클럽 <불안의 꽃> 앙스트블뤼테, 생애 마지막 꽃 [2009.01.09 제743호] [월요일 독서클럽] 화려한 수사와 꽃잎처럼 섬세한 감정 라인으로 그려낸, 한 70대 자본투자가의 사랑 좋은 문학작품에는 ‘규격’이란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독자는 이 책 이 매우 못마땅할지도 모른다. 첫째, 너무나 길다! 둘째, 이해할 수 없는 구성과 구도를 갖고 있다. 왜 여자주인공이 중반 이후에야 등장하는지, 특히 책의 전반부를 장악하다시피 하는 자본 증식 찬가와 주인공 집안의 역사는 주제와 무슨 큰 관련이 있다는 건지. 반드시 그런 비중으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지, 그리고 왜 주인공들의 대사는 독백이든 대화든 엄청난 장광설로만 이루어지는지. 또한 왜 주인공들은 이상하게 말을 주고받는지, 왜 그들의 대화는 저마다 한껏 과장된 에세이의 .. 더보기